(1) 군용 지프에서 본떠 탄생한 시리즈 I, 그리고 ‘영국식 Jeep’의 뿌리
랜드로버(Land Rover)는 이름에서부터 “육지를 달리는 탐험용 차량”이라는 의미가 풍긴다. 실제로 이 브랜드의 기원은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8년, 영국 로버(Rover) 사가 미국의 군용 지프(Jeep)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낸 ‘시리즈 I’을 시초로 삼는다. 전쟁 직후 영국은 재건과 자원 부족에 시달렸고, 로버 사 역시 민수(民需)용 차량으로 빠르게 전환할 만한 새로운 제품이 필요했다. 이때 경량 알루미늄을 차체에 쓰고, 스틸은 최소한으로 사용하되, 강력한 오프로드 성능을 확보한 사륜구동 차를 구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랜드 로버(Land Rover)”란 이름을 달게 되었다.
시리즈 I은 본질적으로 군용 지프를 본떴지만, 영국의 특수한 기후와 농업·임업 환경에 맞춰 개량이 이뤄졌다. 초기 차체는 녹 방지를 위해 알루미늄 합금을 활용했고, 바퀴·서스펜션·트랜스퍼케이스 등은 울퉁불퉁한 지형을 유연히 주파하도록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구조를 채택했다. “튼튼하고 다재다능한 4WD”라는 평판은 곧 농부, 경찰, 소방, 심지어 왕실까지 다양한 사용자에게 퍼져나갔고, 영국 특유의 방수포 지붕(캔버스 탑), 스파르탄 실내 구성이 ‘실용적 오프로더’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195060년대에 이르면, 랜드로버는 식민지 시대의 영국 영향을 받아 아프리카·아시아·중동 지역 곳곳에 보급된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영국이 세계 방방곡곡에 주둔해 있을 때, 험한 지형을 돌파해야 할 군대나 행정 조직, 탐험가들이 랜드로버를 애용하게 된 것이다. 시리즈 II, 시리즈 IIA, 시리즈 III 등으로 차례차례 진화하면서도 ‘튼튼함’과 ‘단순함’, 그리고 “거칠고 극한 환경에서의 신뢰도”라는 강점을 유지했다.90년대에 정식 명칭을 부여받았지만, 그 기원은 1948년 시리즈 I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 이 시기 랜드로버는 영국의 자존심이자 “영국식 지프”라는 별칭까지 얻으면서도, 로버 사 전체 매출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핵심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우리가 랜드로버라고 부르는 브랜드가 독립된 정체성을 확실히 갖춘 것도 이 시기에 확립된 “디펜더(Defender)” 계보를 통해서다. 사실상 디펜더는 시리즈 III의 후속 개념으로 1980
(2) 디펜더, 디스커버리, 레인지로버: 오프로더·프리미엄·패밀리카의 진화
랜드로버 브랜드를 명확히 구분짓는 대표 라인업으로는 크게 디펜더(Defender), 디스커버리(Discovery), 그리고 레인지로버(Range Rover) 계열이 있다. 이 셋은 각각 독특한 개성과 역사를 지닌다.
먼저 디펜더는 전통적인 시리즈 I~III의 유산을 이어받은 정통 오프로더다. 각진 차체와 최소한의 편의장비만 갖춰 “군용·농업·산악 환경” 등 극한 상황을 누비기 최적화되어 있다. 특히 영국군과 관련 국가의 군용차, 응급차, 탐험대 차량 등으로 널리 쓰였고, “도끼로 찍어도 멀쩡한 알루미늄 차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내구성을 인정받았다.
오랜 기간 크게 바뀌지 않은 바디-온-프레임 구조와 리지드 액슬(솔리드 액슬)을 기반으로 했으나, 2019년 이후 등장한 신형 디펜더는 모노코크 차체와 첨단 전자장비를 대거 도입해 오프로더 문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일부 마니아들은 “정통 디펜더의 투박함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하기도 하지만, 랜드로버 측은 “오프로드 성능은 오히려 더 좋아졌고, 안전·편의도 대폭 개선되었다”는 입장이다.
둘째로 **디스커버리(Discovery)**는 1989년에 첫선을 보인 패밀리 SUV다. 디펜더보다 훨씬 편안하고 도시 주행이 가능한 수준의 인테리어와 서스펜션 세팅을 갖췄지만, 여전히 랜드로버 특유의 사륜구동 시스템과 차고 조절 기능 등으로 어느 정도 오프로드 성능을 지켜냈다. 5도어 해치백 형태에 가족이나 여럿이 여행할 수 있는 실내 공간을 강조해,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실용 SUV”라는 시장을 개척했다. 이후 디스커버리는 몇 번의 세대 교체를 거치며 점점 더 현대적인 디자인과 전자제어 시스템(지형 반응 시스템 등)을 도입, 랜드로버의 캐주얼한 패밀리 이미지에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레인지로버(Range Rover)**는 1970년에 탄생해 “럭셔리와 오프로더 성능의 결합”이라는 신개념을 제시했다. 초기 모델은 디펜더보다 넓고 안락한 실내, 파워 스티어링, 코일 스프링 서스펜션 등을 적용해 “오프로더도 편안하고 고급스러울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영국 왕실이 레인지로버를 애용하며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는 확고해졌고, 1990~2000년대를 거치며 미국과 중동 등에서도 “부유층 전용 SUV”로 각광받았다.
현재 레인지로버는 더욱 세분화되어, 레인지로버 스포츠(Range Rover Sport), 레인지로버 이보크(Evoque), 레인지로버 벨라(Velar) 등 다양한 하위 시리즈로 확장되었다. 모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첨단 주행 보조 시스템, 그리고 여전히 뛰어난 험로 주파 능력을 갖추고 있어, 유럽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3) 타타모터스 인수 이후 전동화와 미래 비전, 그리고 디펜더의 귀환
1990년대부터 랜드로버는 여러 차례 매각과 인수 과정을 거쳤다. 로버 그룹이 BMW에 인수되었다가 분할 매각되며, 2000년대 초에는 포드(Ford)가 프리미어 오토모티브 그룹(Premier Automotive Group) 산하로 랜드로버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리고 2008년, 인도 타타모터스(Tata Motors)가 재규어(Jaguar)와 함께 랜드로버를 인수하면서 ‘재규어 랜드로버(JLR)’ 체제가 완성되었다.
타타모터스 인수 초기에는 “과연 인도 기업이 영국 럭셔리 오프로더 브랜드를 잘 운영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지나자, 타타모터스는 JLR에 상당한 경영 자율성을 보장하며, 대규모 투자로 기술 개발과 생산 설비 확충을 지원했다. 그 결과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새 차종을 연이어 선보이며 판매량과 수익성을 크게 개선했고, 중국·미국·중동·러시아 등 신흥 시장 개척에도 성공했다.
이 시기 랜드로버는 전자식 지형 반응 시스템(Terrain Response System), 에어 서스펜션, 알루미늄 모노코크 섀시 등 혁신을 도입해 SUV 주행 감각을 한층 발전시켰고, 레인지로버 이보크 같은 도시형 콤팩트 SUV를 내놓아 젊은층과 여성 고객층까지 흡수했다. 이보크는 투박하던 과거 랜드로버의 이미지와 달리 세련된 쿠페형 디자인을 접목해 “프리미엄 소형 SUV” 시장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에는 전동화 흐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과 순수 전기 모델(예: 레인지로버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디펜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등을 추가하고 있으며, 재규어와 함께 전기차 전용 플랫폼 개발을 추진 중이다. “영국 럭셔리 SUV도 탄소중립 시대에 맞춰야 한다”는 대원칙 아래, 2030년경 이후로 전 차종 전동화를 목표로 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신형 디펜더(프로젝트명 L663)는 2019년 공개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알루미늄 모노코크 바디와 디스커버리·레인지로버와 유사한 첨단 전자식 4WD 시스템, 디지털 계기판, 반자율 주행 보조 등을 탑재해 “과연 이게 진짜 디펜더의 후계자냐”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실제로 각종 오프로더 테스트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여줌으로써 랜드로버 ‘정통 오프로더’의 명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평가받는다. 구형 디펜더 특유의 각진 철제 차체와 수동 윈도우, 쇠스랑 같은 레버류는 사라졌지만, 오프로드 성능은 오히려 상승했다는 게 랜드로버 측 설명이다.
앞으로 랜드로버는 ‘재규어 랜드로버(JLR)’ 체제 아래 전동화와 자율주행 기술을 더욱 본격화할 예정이다. 자율주행이 일반화된 시대에도 랭글러·G-클래스·브롱코 등과 경쟁하는 ‘정통 SUV’ 세그먼트에서, 오프로더 감성과 디지털 편의가 결합된 형태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랜드로버가 개발한 전자식 지형 반응 시스템은 차량이 지면의 상태를 스스로 파악해 서스펜션 높이, 엔진 출력, 변속 세팅, 브레이크 제어 등을 자동으로 조절해주는데, 자율주행이 접목된다면 “모험가가 버튼만 누르면 차가 알아서 험로를 개척해주는” 시나리오도 머지않아 가능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요약하자면, 랜드로버는 1948년 군용 지프를 벤치마킹한 ‘시리즈 I’에서 출발해, 디펜더·디스커버리·레인지로버로 이어지는 독특한 라인업을 형성해왔다. “험로 주행 성능”과 “영국식 감성”을 결합한 브랜드 이미지가 오랜 세월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왕실과 유명 인사, 영국 국민에게 광범위하게 사랑받았다. 타타모터스 인수 이후에는 글로벌 시장에서 SUV 붐과 맞물려 판매량이 급성장했고, 에어 서스펜션·지형 반응 시스템·럭셔리 인테리어 같은 첨단 기술을 대거 도입하며 과거 ‘투박한 농기계’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성공했다.
202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환경 규제와 자율주행 물결이 강해지는 시기다. 랜드로버가 “오프로더의 왕”이라는 전통을 지키면서도 탄소중립, 전동화, 고급스러운 도시형 SUV 수요를 어떻게 동시에 충족시킬지가 관건이다. 신형 디펜더가 보여준 혁신은 그 시도에 대한 첫발이라 할 수 있고, 곧 등장할 레인지로버 전기차 버전, 디스커버리 하이브리드 모델 등이 뒤를 이를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랜드로버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오프로더 브랜드로서 “최고의 오프로드 성능”과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양면성을 계속 발전시켜 나갈 때, 이 영국 SUV 명가가 미래에도 굳건히 살아남으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결국, 랜드로버의 역사는 “사람들이 사륜구동 SUV를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명성을 쌓아온 브랜드”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군용·농업용부터 왕실 의전과 럭셔리 SUV까지 아우르며, 기술 혁신과 모험 정신을 이어왔다. 앞으로 전기 파워트레인 시대가 열리고, 자율주행이 도래해도, “험난한 지형도 우아하고 편안하게 달리는 영국 SUV”라는 브랜드 정신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