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토레 부가티와 기계예술 철학의 탄생 배경
프랑스 알자스(Alsace) 지방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출신 엔지니어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는 기계공학과 예술적 감성을 결합해, 전 세계 자동차사(史)에 한 획을 긋는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1909년 에토레는 프랑스 뮐루즈(Mulhouse) 인근의 모성(Molsheim)에서 첫 공장을 세우고, 자신의 성을 따 “부가티(Bugatti)”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그는 단순히 “빠른 자동차”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기계의 모든 요소가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 유럽의 자동차 회사 대부분은 공학적 실용성과 가격 경쟁력을 중요시했는데, 에토레 부가티는 여기에 ‘심미성’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이를테면, 엔진 블록이나 서스펜션 부품까지도 조각품 수준의 정교함과 조화를 갖추길 원했다. 그래서 부가티 초기 모델들은 기계공학적으로도 우수했지만, 겉보기에도 우아하고 예술적인 장식을 잔뜩 담고 있었다.
부가티는 레이싱 대회에서도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1920~30년대 그랑프리(Grand Prix) 무대에서 부가티는 Type 35, Type 51 등으로 수많은 우승을 거두며, “가장 빠르고 아름다운 레이싱카”라는 명성을 얻었다. Type 35는 뛰어난 엔진 성능과 가벼운 차체, 그리고 혁신적인 댐핑·브레이크 기술로 당시 무대를 지배했으며, 유럽 전역의 자동차 애호가들에게 부가티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에토레 부가티는 “디자인과 엔지니어링을 완벽하게 융합할 수 있다”는 신념을 이 시기에 제대로 입증해 보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전쟁 피해와 경제 파탄을 겪으면서, 부가티도 재정 위기에 빠졌다. 에토레 부가티는 전쟁 직후 세상을 떠났고, 회사는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한 채 한동안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전쟁 이전의 부가티”는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기계예술과 최고 속도의 결합”이라는 브랜드 철학은 자동차 마니아들의 마음에 깊이 남았다.
(2) 폭스바겐 그룹 인수 후 베이론, 시론이 연 하이퍼카 시대
오랜 침체기를 거치던 부가티는 1998년 폭스바겐 그룹에 인수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당시 폭스바겐 그룹은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럭셔리한 양산차”를 만들어 명성을 끌어올리고자 했고, 이를 구현할 만한 유서 깊은 브랜드로 부가티를 선택했다. “부가티”라는 이름에는 이미 ‘예술적 기계’와 ‘레이싱 지배력’이라는 전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폭스바겐 그룹의 막대한 투자와 최신 기술 지원을 등에 업은 부가티 엔지니어들은, 2005년에 드디어 ‘베이론(Veyron)’을 출시한다. 베이론은 8.0리터 W16 쿼드 터보 엔진을 탑재해 최고 출력 1,000마력 이상을 발휘하고, 시속 400km/h를 돌파하는 전무후무한 양산차였다. “시속 400km/h를 넘어설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베이론은 실제로 이를 달성해 보임으로써 ‘하이퍼카(hypercar)’ 시대를 선언했다.
베이론의 후속 모델인 시론(Chiron)은 한층 더 발전된 엔지니어링으로 최대 1,500마력을 넘어서는 성능을 달성했다. 슈퍼차저나 터보차저 기술을 넘어, 냉각 시스템·타이어·공기역학 등 모든 분야에서 당시 자동차 공학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예컨대 400km/h 이상의 속도를 견딜 수 있는 타이어를 개발하기 위해, 미쉐린(Michelin)과 특별 협업 프로젝트가 가동되었다. 엔진 냉각도 시속 400km/h를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어마어마한 열을 제어해야 했으므로, 복잡한 냉각관과 라디에이터 시스템이 설계되었다. 이렇듯 “시론”은 베이론을 능가하는 최고속도(약 420km/h 이상)를 과시하며, “지상 주행 가능한 가장 빠른 로드카”라는 타이틀을 공고히 했다.
부가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드보(Divo), 센토디에치(Centodieci) 같은 한정판 모델을 발표하면서 “희소성과 절대적 속도”를 동시 추구했다. 로얄티 고객 및 수집가들을 위해 극소수만 생산하는 초고가 차량들이며, 수십억 원을 호가해도 순식간에 ‘솔드 아웃’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부가티가 ‘가장 비싸면서 가장 빠른 하이퍼카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철저히 구축한 것이다.
(3) 초호화 극소량 생산, 전동화 흐름에 대한 고민과 미래 전망
부가티는 “가장 빠르고 가장 럭셔리한 차”를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매년 극소수 대만 생산·납품한다. 주문자 맞춤형 사양을 적용해, 고객은 차량 내외관의 색상과 소재를 개인 취향에 맞춰 지정할 수 있고, 부가티 장인들은 모든 부품을 수작업에 가깝게 조립한다. 이처럼 희소성이 극단적으로 높아 가치가 더 상승하고, 부가티는 하이퍼카 시장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린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자동차 업계 전반에 전동화(Electrification)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고, 내연기관 엔진에 의존하던 초고성능 모델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부가티의 핵심인 W16 쿼드 터보 엔진은 압도적 성능으로 상징성을 지니지만, 배출가스 규제와 연비 제한이 갈수록 엄격해지는 시대에 얼마만큼 유지 가능할지 불투명하다. 폭스바겐 그룹 내부에서도 포르쉐나 아우디가 하이브리드·전기 파워트레인을 선도하는 추세이므로, 부가티가 언젠가는 전동화로 전환하거나, 최소한 하이브리드 모델을 고려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가고 있다.
일각에서는 “배기음과 고배기량 엔진 사운드가 부가티라는 브랜드가 지닌 감성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전동화로 넘어가면 부가티만의 감성이 사라지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내연기관 성능을 보조해 더 폭발적인 가속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 전기 파워트레인의 즉각적인 토크가 하이퍼카 성능 향상에 유리하다는 점 등을 들어 “부가티식 전동화는 오히려 새 시대의 하이퍼카를 정의할 수 있다”는 긍정론도 제기된다.
실제로 부가티는 리막(Rimac)과의 협업 소식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리막은 고성능 전기 하이퍼카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인정받은 업체로, 폭스바겐 그룹 내에서 포르쉐와 함께 전동화 시너지를 낼 파트너로 꼽혔다. 2021년 폭스바겐 그룹은 부가티와 리막을 합작해 “부가티-리막”이라는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곧 부가티의 전동화 로드맵이 본격화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앞으로 “리막의 전기 하이퍼카 기술 + 부가티의 초고속 노하우”가 결합된 모델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한편, “부가티는 양산차 판매로 이윤을 낸다기보다, 브랜드 가치와 초고가 한정판 판매로 수익을 낸다”는 평가도 있다. 따라서 전동화 시대로 넘어가도 “최고속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전기 파워트레인이 내연기관 이상의 성능을 보여줄 수도 있다. 하이퍼카라는 카테고리는 이미 “돈으로 성능의 한계를 사는” 세계이므로, 배터리나 모터 성능에서 불가능해 보이던 스펙을 실현해낼 가능성이 크다.
궁극적으로 부가티는 “배기음 대신 전기음”이라는 변화를 어떻게 자신만의 철학으로 해석해낼지가 관건이다. 에토레 부가티가 강조한 ‘기계예술’은 시각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엔진 사운드와 운전자의 오감 체험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전기 하이퍼카 시대에 이르러, 부가티가 새로운 사운드 디자인·에어로다이내믹 역학·실내외 디지털 인터페이스 등을 통해 “예술성과 속도”를 어떻게 재해석하느냐가 미래 포인트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부가티는 잠시 사라졌던 2차 세계대전 후부터 폭스바겐 그룹 인수로 부활해, 베이론과 시론으로 ‘하이퍼카’ 시대를 열었다. 극단적 성능과 초호화 수작업 생산이라는 독보적 컨셉을 유지하며, 자동차 산업에서 가장 극적인 브랜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전동화 흐름은 부가티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며, 만약 이를 성공적으로 소화한다면 “시속 500km/h가 넘는 전기 하이퍼카” 같은 초현실적 성능의 모델이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술 기계”라는 창립자 에토레 부가티의 꿈이, 이번에는 전기 모터와 배터리를 무기로 다시금 실현될지 전 세계 자동차 애호가들은 기다리고 있다.